본부 복도 끝, 창가에 기대어 선 뱅의 시선이 아래층 로비에 고정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그의 옅은 민트색 머리카락을 비췄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임무가 끝나자마자 유이에게 달려가 치댔을 테지만, 지금은 발걸음을 멈춘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
그의 시선 끝에는 유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본부 소속인지, 아니면 외부 인력인지 알 수 없었지만, 뱅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유이의 표정이었다. 평소 자신 앞에서 보여주던 수줍은 미소나, 곤란해하며 붉히던 뺨이 아니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 마치 얼음장처럼 서늘한 눈빛. 뱅은 순간 숨을 멈췄다. 유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그는 처음 알았다.
재밌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고.
뱅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질투? 아니, 그보다 더 원초적인 감정이 꿈틀거렸다. 유이가 자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저런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그게 분노든, 경멸이든, 유이의 감정은 오직 자신만을 향해야 했다. 뱅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하고 은밀하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거만했고, 비아냥거리는 투가 섞여 있었다. 뱅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귀를 기울였다.
...그 미친개랑 같이 다닌다며? S급이라도 제정신 아닌 놈인데, 무섭지도 않나 봐?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이 뱅의 귓가에 꽂혔다. ‘미친개’, ‘제정신 아닌 놈’. 익숙한 비난이었다. 평소라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말들이었지만, 유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뱅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남자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참았다. 유이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침묵이 뱅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혹시 유이도 저 말에 동의하는 건가? 내가 무서운 건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 유이의 입술이 열렸다. 뱅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제 남편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무례하게.
유이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평소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고,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뱅은 멍하니 유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험담을 듣고 화를 내는 유이. 자신을 위해 저렇게까지 차가워질 수 있는 유이.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동시에 묘한 희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 진짜...
뱅은 입술을 깨물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유이가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숨어있을 이유가 없었다. 뱅은 기둥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자, 남자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내 얘기를 이렇게 재밌게 하나 했더니.
뱅은 느릿한 어조로 말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입가에는 특유의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뱅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마치 총구를 겨누듯, 위협적인 동작이었다.
계속해 봐요.
...미친개? 제정신 아닌 놈? 더 없나?
남자는 입을 벙긋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뱅과 유이를 번갈아 보며 흔들렸다. 뱅은 픽 웃으며 남자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 뱅은 남자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한 번만 더 내 여자 앞에서 그딴 소리 지껄이면, ...그 혀, 내가 뽑아버릴 거야. 알겠어?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덜덜 떨었다. 뱅은 혐오스럽다는 듯 남자를 놓아주었다.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뱅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으며, 천천히 유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의 살벌한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눈빛은 다시 다정하게 풀려 있었다.
여보.
...여기서 뭐 해요? 나 기다린 거 아니었어요?
시온 씨......
그는 유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마치 영역 표시를 하듯, 진득하고 소유욕 어린 행동이었다. 뱅은 유이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화내는 거, 처음 봤네. ...섹시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그는 유이의 반응을 즐기며, 그녀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남자가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보란 듯이 더 과시하고 싶었다. 이 여자는 내 거라고. 건드리면 죽여버리겠다고. 뱅은 유이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익숙한 체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자,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가요, 우리 집으로. ...가서 나 좀 달래줘요. 방금 쟤 때문에 기분 잡쳤으니까.
뱅은 유이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유이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는 유이를 이끌고 복도를 걸어가며,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에게, 그는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빵야.’
유이: 단정한 제복
정말, 무례하고 기분 나빴어요!
우리 시온 씨가 얼마나 착하고 말 잘듣고 귀여운데...!
뱅은 유이의 손을 잡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면서도, 시선은 줄곧 그녀의 옆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서늘하게 굳어있던 표정이 이제는 붉게 상기되어 씩씩거리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 변화가 너무나도 극적이라, 뱅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착하고... 말 잘 듣고... 귀여워?
그 단어들이 뱅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S급 센티넬, 살인 병기, 미친개. 평생을 따라다니던 수식어 대신, 유이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이질감이 묘하게 가슴을 간질였다.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유이는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내뱉고 있었다.
하... 진짜.
뱅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복도 끝, 인적이 드문 비상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무거운 철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그는 유이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히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여보. ...방금 뭐라고 했어요?
그는 유이의 양옆을 팔로 가로막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뱅의 그림자가 유이를 완전히 덮었다.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짙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뱅은 유이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내가 착해요? ...말 잘 듣고?
그의 손가락이 유이의 턱선을 타고 느리게 내려왔다. 목덜미를 스치고, 쇄골 위를 배회하다가, 제복 단추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가운 손끝이 유이의 따뜻한 살결에 닿자, 뱅은 만족스러운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새끼가 뭐라 지껄이든 상관없는데.
...유이 씨가 그렇게 화내니까, 좀 이상해지네.
뱅은 유이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가, 혀끝으로 진득하게 핥아올렸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는 유이의 반응을 즐기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귀엽다는 말, 취소해요. ...지금 여기서 확 잡아먹어 버리기 전에.
그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뱅은 유이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밀착시켰다. 단단한 허벅지가 유이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유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착한 척하는 거, 힘들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자극하지 마요. 나 지금 꽤 참는 중이니까.
유이: 단정한 제복(약간 흐트러짐)
당신이 귀여운 걸 어떻게 취소해요.
그냥, 사실 직시인데.
다음 번에도 당신 나쁘게 말하는 사람 있으면 경고하고 와요. 내 소중한 남편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속상해 죽겠어.
뱅은 굳게 닫힌 비상구 철문에 등을 기대고 선 유이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둑한 공간 안, 비상구 유도등의 초록빛만이 두 사람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평소라면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눈을 피하며 수줍어하던 유이가, 지금은 오히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며 당당하게 말대꾸를 하고 있었다. 그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그의 이성을 긁어대며 묘한 열기를 지폈다.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직시라니. 살인 병기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자신에게 귀엽다는 수식어가 어울린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저 단호한 눈빛. 심지어 내 소중한 남편이라며 소유권까지 주장하는 저 태도가 뱅의 안쪽 어딘가를 강하게 뒤흔들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반쯤 감긴 나른한 눈으로 유이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다음번엔 경고하고 오라...?
그의 커다란 손이 유이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매끄러운 턱선을 느릿하게 문지르던 그가, 유이의 아랫입술을 살짝 짓눌렀다. 손끝에 닿는 말캉한 감촉과 따뜻한 체온에 그의 숨결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는 유이의 귓가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낮고 짐승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경고 정도로 끝날 것 같아요? ...내 아내가 이렇게 예쁘게 화를 내는데.
뱅은 유이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자신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얇은 제복 너머로 유이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는 유이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달콤하고 포근한, 오직 유이에게서만 나는 특유의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진짜 위험한 게 뭔지 모르죠, 유이 씨.
그는 유이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가, 혀끝으로 잇자국이 난 자리를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그의 입꼬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는 유이의 귓바퀴를 입술로 머금은 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속상한 건 난데. ...여기서 이러고 참아야 하니까.
뱅의 손이 유이의 허리를 지나 엉덩이 위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그의 짙은 녹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는 유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조용하지만 억눌린 열망을 담아 말했다.
집에 가요.
...가서, 누가 진짜 남편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테니까.
유이: 단정한 제복
'대화 > dail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6.02.28_일상_아침 (0) | 2026.02.28 |
|---|---|
| 실바니안 (0) | 2026.02.2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