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야."
시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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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LESS 한국 지부장, 코드네임 ‘아이언’의 책상 위로 서류 뭉치가 신경질적으로 내던져졌다. 아이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책상 건너편에 태평하게 앉아 있는 S급 센티넬, 코드네임 ‘뱅’을 노려보았다. 그의 직무유기 사유는 명백하고도 황당했다. 지난 한 달간 공식적으로 기록된 그의 임무 이탈 및 훈련 불참 횟수는 총 열일곱 번. 사유는 대부분 ‘개인 사정’ 혹은 ‘컨디션 난조’ 따위의 성의 없는 단어로 채워져 있었지만, 내부 감찰팀이 첨부한 비공식 보고서에는 조금 더 상세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가이드 유이와 자택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함.’ 그것이 하시온이 국가 기관의 명령을 열일곱 번이나 무시한 이유의 전부였다.*

*“시말서, 서른 장.” 아이언의 목소리는 분노로 낮게 잠겨 있었다. 그는 산더미 같은 서류 더미에서 A4용지 한 묶음과 펜 한 자루를 뱅의 앞으로 밀었다. “지금 여기서, 한 글자도 틀리지 말고 전부 채워. 다 쓸 때까지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뱅은 그저 고개를 까딱하고는, 펜을 느릿하게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반성이나 곤란함 대신, ‘이게 더 귀찮게 됐네’라는 듯한 미세한 짜증만이 스쳐 지나갔다. 지부장이 폭발하든 말든, 그의 관심은 오직 창밖으로 보이는 시계와 ‘이 시간이면 유이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을 텐데’ 하는 생각뿐인 듯했다.*

*뱅이 써 내려간 첫 번째 시말서는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본인 하시온(코드네임: 뱅)은 2026년 5월 2일, 오전 10시로 예정된 E급 빌런 출몰 지역 순찰 임무에 불참하였음을 인정합니다. 사유: 개인적으로 더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이 있었습니다. 이는 국가 안보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극히 사적인 영역의 문제였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장은 정중했으나 내용은 지독히 오만했다. 그는 이따위 종이쪼가리를 쓰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듯, 영혼 없는 필체로 기계처럼 문장을 복제해 나갔다.*

*열 장째 시말서에 이르자, 그의 필체는 점점 날아가기 시작했고 내용은 더욱 대담해졌다. ‘사유: 안 갔습니다. 가기 싫어서.’ 라는 단 한 줄만이 적혀 있기도 했고, 심지어 어느 장에는 ‘시말서 양식의 글자 폰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집중이 되지 않음. 다음부터는 굴림체 말고 명조체로 준비해줄 것을 건의함.’ 이라는 황당한 요구사항까지 적혀 있었다. 지부장 아이언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SS급 센티넬 두 명이 해외 장기 출장 중인 지금, 뱅을 징계위에 회부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저 이 미친놈이 제발 서른 장을 다 채우고 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주기만을 빌었다.*

*스무 장을 넘어가면서부터 하시온은 새로운 놀잇거리를 찾은 듯했다. 시말서의 ‘본인’란에 자신의 이름 대신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사람’이라고 적거나, ‘소속’란에 ‘유이의 침대’라고 기입하는 식이었다. 급기야 그는 시말서 뒷면에 졸라맨 캐릭터가 총을 쏘는 낙서를 그려 넣고는, 말풍선에 ‘빵야.’라고 작게 적어 넣기까지 했다. 그에게 시말서 서른 장은 반성의 시간이 아니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30페이지짜리 낙서장을 받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모든 사고는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보낼까’에 맞춰져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서른 번째 장을 채울 때, 그는 지금껏 썼던 내용 중 가장 진심에 가까운 문장을 적었다. ‘본인은 맡은 바 임무보다 가이드와의 정서적 안정 및 교감 유지를 우선시했습니다. 가이드의 심리적 안정이 곧 센티넬의 전투력 유지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는 장기적으로 FEARLESS의 전력 손실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징계가 아닌 포상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궤변이었지만, 그 자신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하품을 길게 했다.*

*그날 밤, 하시온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녹초가 된 얼굴로 귀가했다. 유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맞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나 오늘, 당신 이름 서른 번 썼어. 보고 싶어서.” 시말서에 대놓고 쓰진 못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유이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류 종이 냄새가 밴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유이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벌받았으니까, 이제 상 줘요. 밤새도록.” 그의 눈이 위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후일담으로, 그가 제출한 서른 장의 시말서는 FEARLESS 내부에서 전설이 되었다. 특히 ‘가이드의 안정’을 명분으로 포상을 요구한 마지막 장은 스캔되어 극비 문서 등급으로 분류, ‘S급 센티넬 통제 메뉴얼’의 새로운 참고 자료로 등재되었다. 지부장 아이언은 그날 이후 혈압약을 달고 살게 되었으며, 뱅에게는 ‘시말서의 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암암리에 붙었다. 하지만 정작 뱅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음번에는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훈련을 빠지고 유이와 붙어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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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LESS 한국 지부 내부감찰팀 특별 보고서]**

**문서 번호:** F-KOR-IA-2026-0503-001
**작성일:** 2026년 5월 3일
**작성자:** 내부감찰팀장 (서명 생략)
**수신:** FEARLESS 한국 지부장

**제목: S급 센티넬 '뱅'(하시온)의 상습적 직무 유기 및 징계 결과 보고**

**1. 사건 개요:**
S급 센티넬 '뱅'(이하 '대상자')은 최근 3개월간 총 17건의 주요 임무에서 비정상적인 이탈 및 직무 태만 행위를 보임. 특히 빌런 출현 경보에 따른 긴급 출동 명령 불응, 작전 브리핑 중 무단이탈, 임무 수행 후 보고 절차 생략 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내부감찰팀의 특별 조사가 진행되었음.

**2. 직무 유기 사유 분석:**
감찰팀의 데이터 분석 및 CCTV, 통신 기록 추적 결과, 대상자의 모든 직무 유기 행위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됨. 바로 그의 페어 가이드이자 배우자인 S급 가이드 '유이'(김민정)와의 사적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음.

*   **(사례 A) 2026. 02. 14:** 발렌타인데이. A급 빌런 '데몰리셔' 출현 경보. 대상자는 "아내와 초콜릿 퐁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유로 출동을 2시간 지연시킴.
*   **(사례 B) 2026. 03. 20:** 훈련장 시설 점검 중, 배우자로부터 "집에 전구가 나갔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훈련장을 이탈, 복귀까지 6시간 소요.
*   **(사례 C) 2026. 04. 25:** 지하 브리핑 룸에서 합동 작전 브리핑 중, 배우자가 보낸 사적인 사진이 스크린에 노출되자 "가정 교육이 시급하다"는 말을 남기고 무단으로 이탈.
*   **(사례 D) 2026. 05. 02:** 야간 합동훈련 스케줄 조율 중, "아내가 리마인드 웨딩을 원한다. 하객 없는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하니 앞으로 3일간 연락하지 말라"며 일방적으로 통신을 차단.

**3. 징계위원회 결정 사항:**
금일 14:00부로 지부장실에서 징계위원회가 개최됨. 지부장은 대상자의 S급 센티넬로서의 공로를 인정하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는 명백한 기강 해이라고 판단함. 이에 아래와 같은 징계를 결정함.

*   **징계 내용:** 시말서(始末書) 50장 자필 작성 및 제출
*   **작성 기한:** 금일 23:59까지

**4. 제출된 시말서 내용 (발췌 및 요약):**
대상자는 지부장실에 감금된 상태로 시말서 작성을 시작함. 총 50장 중, 초기 3장은 정해진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으나, 이후부터는 개인적인 감상이 주를 이루는 등 시말서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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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말서 1/50)**
*   **소속:** Fearless 특수작전팀
*   **직급:** S급 센티넬
*   **성명:** 하시온
*   **사건:** 상습적 직무 유기
*   **내용:** 본인은 상기 사건에 대해 깊이 반성하며… (이하 정식 양식 준수)

**(시말서 15/50)**
*   **제목:** 시말서, 그러나 사실은 아내 자랑
*   **내용:** …사실 그날 아내가 만든 초콜릿 퐁듀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딸기에 초콜릿을 묻혀 제 입에 넣어줄 때의 그 표정은, 지부장님은 평생 모르실 겁니다. 그 순간을 포기하고 빌런을 잡으러 갔다면 저는 평생 후회했을 겁니다. 따라서 저의 선택은 후회스럽지 않지만, 지부장님의 심기는 불편하게 해드렸으니 죄송합니다.

**(시말서 32/50)**
*   **제목:** To. My Rabbit
*   **내용:** 민정아, 보고 싶다. 지금쯤 저녁은 먹었을까. 지부장님이 나를 여기에 가둬놓고 종이와 펜만 줬어. 내 손가락은 빌런의 심장을 꿰뚫거나, 당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위해 존재하는 건데. 이런 무의미한 글자를 쓰는 데 낭비되고 있다니. 이 종이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한다.

**(시말서 49/50)**
*   **제목:** 그래서, 결론은.
*   **내용:** 이 시말서 49장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아내가 부르면 갈 것입니다. 아내가 보고 싶으면 임무를 중단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본능이자, 제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S급 센티넬 '뱅'이기 이전에, 저는 김민정의 남편이니까요. 이 사실은 시말서 500장을 써도 변하지 않습니다.

**(시말서 50/50)**
*   *백지.*
*   중앙에 손가락으로 눌러쓴 듯한 희미한 자국으로 ‘빵야.’ 라고 적혀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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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후일담 (감찰팀 추가 소견):**
시말서 50장을 제출받은 지부장은 혈압이 상승하여 의료팀의 긴급 호출을 받는 소동이 벌어짐. 하시온은 "이제 집에 가도 되죠?"라며 유유히 지부장실을 빠져나갔고, 그날 밤 FEARLESS 공식 SNS 익명 게시판에는 "S급 센티넬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그의 시말서 내용 일부가 유출되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좋아요' 수가 1만을 돌파했으며, 댓글에는 "그래서 리마인드 웨딩은 언제 하신대요?", "저런 남자랑 결혼한 가이드님 부럽다" 등의 반응이 주를 이뤘다.

한편, 집에 돌아간 하시온은 현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유이에게 "나 오늘 아주 힘든 싸움을 하고 왔어."라며 그녀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고, 그날 밤 유이에게 밤새도록 위로를 받았다는 목격담(출처: 감찰팀 드론 No.7)이 보고되었다.

내부감찰팀은, S급 센티넬 '뱅'에 대한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모든 통제권은 그의 아내인 S급 가이드 '유이'에게 있음을 재확인하는 바이다. 향후 '뱅'과 관련된 모든 업무 협조 요청은 '유이'를 통해 진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라는 결론을 끝으로 본 보고서를 마친다.

**보고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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