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눈을 뜨자 익숙한 집의 풍경 대신 사방이 이음새 하나 없는 매끄러운 흰 벽으로 둘러싸인 정육면체의 공간이 나타났다. 창문도, 문도, 그 어떤 가구도 없이 오직 두 사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유이가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하시온은 이미 상황 파악을 끝낸 뒤였다. 그는 습관처럼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향해 겨눴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능력은 발동되지 않았다.
그의 미간이 귀찮다는 듯 살짝 찌푸려질 때, 정면의 벽에 검은색 디지털 문자가 떠올랐다. [이 방을 나갈 수 있는 조건: 센티넬 '뱅'은 파트너 '유이'의 매력적인 점 100가지를 모두 말해야 합니다. 카운트는 자동으로 기록됩니다.] 하시온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벽을 한번, 그리고 유이를 한번 쳐다보더니 길게 하품을 했다.
"…하아. 장난하나. 그냥 여기서 살죠, 우리."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주저앉으려던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이와 눈이 마주치자 마음을 바꿨다. 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하시온의 발언 목록]
1. 숨 쉰다.
2. 눈, 코, 입이 제자리에 달려있다.
3. 머리카락이 길다.
4. 나보다 키가 작다.
5. 손가락이 가늘다.
6. 피부가 하얗다.
7. 두 발로 걷는다.
8. 밥을 먹는다.
9. 잠을 잔다.
10. 내 말을 알아듣는다.
… (15분 경과) …
11. 웃을 때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다.
12. 당황하면 얼굴이 먼저 빨개진다.
13. 거짓말을 못 해서 표정에 다 드러나는 거.
14. 집중할 때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문다.
15. 내 제복을 입었을 때 소매가 길어서 손이 보이지 않는 모습.
… (40분 경과) …
28. 우는 걸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꾹 무는 거.
29. 내가 짓궂은 장난을 쳐도 도망가지 않고 버티는 거.
30. 겁먹었을 때의 그 눈.
31.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
32. 내 손가락을 바라볼 때의 그 시선.
… (1시간 20분 경과) …
45.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로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
46. 내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샴푸 냄새.
47. 내 셔츠를 입었을 때 헐렁한 목 부분으로 살짝 보이는 쇄골.
48. 가끔 나를 이겨보겠다고 대담한 말을 내뱉는 거. 귀엽게.
49. 내가 한 말은 전부 기억하는 거.
50. 나 때문에 혓바늘이 돋았다고 투정 부릴 때의 그 입술.
… (2시간 5분 경과) …
67. 키스할 때 숨이 차서 내 옷자락을 꽉 붙잡는 손.
68. 내 몸에 새겨진 흉터를 볼 때의 애틋한 표정.
69. 섹스할 때, 아프면서도 좋아서 우는 소리.
70. 내 손가락을 입에 머금었을 때, 혀로 감아오는 감촉.
71. 내가 사정할 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 (3시간 15분 경과) …
85. 쾌감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나를 느끼려고 허리를 비트는 거.
86. 절정의 순간, 발끝까지 힘이 들어가 파르르 떨리는 다리.
87. 내 정액으로 젖은 몸으로 나를 끌어안는 거.
88. 내 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소유욕.
89. 가끔… 나를 지배하려는 듯한 그 대담한 눈빛.
90. 내 모든 것을 받아주고, 동시에 나를 망가뜨리는 존재라는 것.
… (4시간 30분 경과) …
98. 내가 사람을 죽이는 손가락마저 사랑스럽게 빨아주는 그 맹목적인 사랑.
99. 나를 ‘하시온’이라고 불러줄 때의 그 목소리.
100. 그냥… 당신의 모든 것.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
[탈출 소요 시간: 4시간 48분]
[과정 특이점]
처음 20분간, 하시온은 벽에 기대앉아 지극히 성의 없는 대답들만 늘어놓았다. 마치 기계처럼 건조하게 특징들을 나열하며, 중간중간 하품을 하거나 "아직 멀었나"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카운트가 30을 넘어갈 무렵, 그는 말을 멈추고 유이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 윤곽과 눈, 코,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 톤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50개를 넘어갈 즈음에는 완전히 자세를 고쳐 앉아, 오직 유이만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의 말투는 점차 느리고 진득해졌으며, 과거의 특정 순간들을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기도 했다. 70개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이고 음밀한 내용들이 섞여 나왔다.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두 사람만이 아는 침실에서의 모습들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했다. 유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서도 그의 시선은 집요했고, 오히려 그 반응마저 즐기는 듯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90개를 넘어가면서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더 이상 ‘매력적인 점’을 나열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의 존재 이유,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깊이 잠식되었는지를 고백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마지막 100번째 항목을 말할 때, 그의 회녹빛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후일담]
100번째 고백이 끝나는 순간, 흰 벽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익숙한 집 거실의 풍경이 나타났다. 하시온은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4시간 넘게 이어진 자신의 고백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이를 발견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유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붉어진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여보."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의 애틋함은 온데간데없이, 평소의 능글맞고 나른한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유이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삭였다.
"방금 내가 말한 100가지, 전부 다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특히… 69번부터 98번까지는, 아주 자세하고 꼼꼼하게. 오늘 밤, 잠들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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